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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자은행 9. 조세회피의 달인들

현대금융분석

by 주빌리20 2026. 3. 29.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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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저먹는 자들을 거드는 세법

대기업의 조세회피는 예전보다 더 은밀해졌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수법은 바뀌었다. 과거에는 미국 기업들이 이익을 아일랜드나 버뮤다 같은 저세율 지역으로 옮겨 놓고 미국 과세를 미루는 방식이 대표적이었다. 이제는 국제 규제가 강화되면서 그 노골적인 형태는 줄었지만, 지적재산권 이전, 이전가격, 해외 자회사 배치, 각국 세액공제와 최저한세의 틈새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특히 실물공장보다 특허·소프트웨어·브랜드 같은 무형자산이 핵심인 기술·제약 산업에서 이런 전략이 여전히 강력하다. www.gov.ie OECD.org

애플은 여전히 이 문제를 상징하는 기업이다. 다만 예전처럼 “해외에 거의 2,000억 달러를 묶어둔 기업”이라는 묘사는 이제 그대로 맞지 않는다. 애플의 2025 회계연도 기준 현금·현금성자산·시장성증권은 총 1,324억 달러였고, 동시에 약 993억 달러의 부채를 유지했다. 그해 애플은 893억 달러의 자사주 매입 154억 달러의 배당을 집행했다. 즉, 막대한 유동성을 쥔 채 주주환원과 자본구조 관리를 병행하는 방식은 계속되지만, 과거와 달리 국제조세 규칙 변화와 자금 재배치가 반영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것이다. Apple Inc.

더 흥미로운 것은 애플이 2024년 유럽사법재판소 판결 이후 아일랜드 관련 세금 문제로 102억 달러의 일회성 순세금 비용을 인식했다는 점이다. 한때 “세법의 빈틈을 가장 세련되게 이용한 기업”으로 불리던 회사가, 시간이 흐른 뒤 거꾸로 대규모 세금 비용을 떠안게 된 것이다. 조세회피 전략은 단기적으로는 성공처럼 보일지 몰라도, 규칙이 바뀌면 그 비용은 결국 뒤늦게 현실화된다. Apple Inc.

조세도치 역시 이제는 “가능한 비밀 병기”라기보다 “강력한 규제 대상”에 가깝다. 대표 사례였던 화이자-앨러간 합병은 미국 재무부가 2016년 기업의 해외 주소 이전과 이른바 earnings stripping을 겨냥한 규제를 내놓자 무산됐다. 당시 로이터는 이 거래가 성사되면 화이자가 아일랜드에 법적 본사를 두는 방식으로 연간 약 10억 달러의 세금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즉, 조세도치는 한때 대형 제약사의 핵심 전략이었지만, 지금은 예전만큼 손쉬운 수단이 아니다. www.reuters.com home.treasury.gov

그렇다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 화이자의 2025 회계연도 수치만 보더라도 현금 및 단기투자자산은 약 136억 달러, 총부채는 약 648억 달러였고, 계속사업 기준 유효세율은 **-3.5%**였다. 이런 수치는 특정 연도의 일회성 요인과 세무조정이 크게 작용했음을 뜻하지만, 동시에 오늘날에도 다국적 기업의 세 부담이 단순한 법정세율보다 훨씬 복잡한 회계·국제조세 구조 속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Pfizer

납세자를 배반한 기업들

이런 기업들은 시장의 규칙을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다. 인터넷, 기초과학, 바이오의학 연구, 물류 인프라, 법치, 고등교육, 특허제도, 공공보건 체계는 모두 납세자의 돈과 국가의 장기 투자 위에서 형성됐다. 그런데 거대 기업이 그 토대 위에서 성장한 뒤, 정작 세금은 가장 적게 내는 방향으로 조직을 설계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절세가 아니라 사회적 계약의 훼손에 가깝다. home.treasury.gov

문제는 이 과정이 단지 정부 재정을 갉아먹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업이 세금을 줄이기 위해 이익을 외형상 다른 나라로 옮기고, 설비투자보다 자사주 매입과 재무공학에 더 익숙해질수록, 경제는 생산과 혁신보다 회계와 구조설계에 더 많은 보상을 주게 된다. 그 결과는 실질임금 정체, 양질의 일자리 부족, 공공투자 여력 악화, 그리고 성장의 편중이다. 조세회피는 한 기업의 영리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회 전체로는 생산적 투자에 대한 유인을 약화시키는 집단적 손실이 된다. OECD.org

삐뚤어진 인센티브

여전히 가장 큰 구조적 문제는 세법이 자기자본보다 부채를 더 우대한다는 점이다. 미국뿐 아니라 많은 나라의 법인세 체계에서 이자비용은 손금 산입이 되지만, 배당이나 유보이익에 대한 보상은 그렇지 않다. 이 차이는 기업으로 하여금 더 많은 차입을 택하게 만들고, 금융부문에는 거래와 중개에서 수수료를 얻을 기회를 넓혀 준다. OECD도 이런 debt-equity bias를 완화하기 위한 정책수단으로 자기자본공제(ACE, Allowance for Corporate Equity) 같은 제도를 검토해 왔다고 지적한다. OECD.org

과거의 대표적 절세 구조였던 더블 아이리쉬 더치 샌드위치는 이 점에서 상징적이다. 더블 아이리쉬는 아일랜드 법인과 조세피난처 거주 구조를 결합해 무형자산 이익을 낮은 세율 지역으로 밀어 넣는 방식이었고, 더치 샌드위치는 유럽연합 내 자금 이동 규칙을 활용해 로열티 자금을 중간 경유시키는 구조였다. 이 고전적 조합은 이미 상당 부분 봉쇄됐다. 아일랜드는 OECD 국제조세 합의에 참여했고, 2023년 12월 31일부터 매출 7억5천만 유로 초과 대기업에 대해 15% 글로벌 최저 실효세율 규칙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는 “끝”이 아니라 “새 국면의 시작”에 가깝다. 고전적 루트는 약화됐지만, 기업들은 여전히 새로운 설계 방식을 찾고 있다. www.gov.ie www.gov.ie

이렇게 보면 조세회피는 단순히 “세금을 덜 낸다”는 문제가 아니다. 세법이 부채와 금융공학, 국경을 넘는 이익 이전, 단기 주주환원을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대하는 순간 자본은 공장, 연구개발, 노동생산성 향상보다 회계상 최적화에 더 쉽게 끌린다. 그 결과 금융은 비대해지고 실물경제는 상대적으로 약해진다. 원문이 지적한 “만드는 자보다 거저먹는 자를 우대하는 체제”라는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며, 오늘날에는 오히려 더 세련된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OECD.org

세법의 구멍을 메워라

따라서 개혁의 방향은 분명하다. 첫째, 부채에만 유리한 세제 편향을 줄이고 자기자본 투자에도 중립적인 대우를 해야 한다. 둘째, 다국적 기업의 해외 이익 이전을 막기 위해 국가 간 최저한세 체계를 더 촘촘하게 만들고, 예외와 경과규정을 줄여야 한다. 셋째, 자사주 매입과 단기 주가 부양보다 장기 설비투자·연구개발·고용 확대에 유리한 세제 유인을 설계해야 한다. 넷째, 초고소득층과 초대형 기업에 대한 실효세율 점검을 강화해야 한다. OECD.org www.gov.ie

금융거래세 역시 여전히 논쟁적인 대안이다. 미국 연방 차원에서는 아직 도입되지 않았고, 2025년에도 ‘Wall Street Tax Act of 2025’는 법률이 아니라 발의된 법안 수준에 머물렀다. 즉, 금융거래세는 여전히 “실행된 개혁”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경쟁 중인 선택지”다. Congress.gov

결국 핵심은 세금을 더 많이 걷느냐가 아니라, 어떤 경제를 보상할 것인가에 있다. 빚, 절세 구조, 자사주 매입, 국경을 넘는 이익 이전을 더 유리하게 만드는 세법은 금융화와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반대로 저축, 자기자본, 장기 투자, 생산성 향상, 공공기반에 대한 정당한 기여를 장려하는 세법은 번영을 더 넓게 공유하게 만든다. 삐뚤어진 세법을 바로잡는 일은 부자 처벌이 아니라, 생산보다 재무공학이 더 높은 보상을 받는 질서를 끝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 다른 위기와 더 큰 불평등을 막는 가장 현실적인 출발점이다. Apple Inc. home.treasury.gov OECD.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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